한국

세상과 나: 타자와 관계맺는다는 것

이지형
(숙명여대 일본학과)

(1) 관계맺기의 중요성과 어려움
타자와의 ‘관계맺기’에 힘겨워하는 현대인들이 늘고 있습니다. 특히 청년층에서 친구, 동료 등과 관계맺기의 어려움, 불편함을 호소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히키코모리, 혼밥, 독강 등은 그 알기 쉬운 예시이지요. 사회적 격리가 불가피했던 코로나 사태 이후 이러한 양상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물론 혼자만의 시간을 자발적으로 기꺼이 즐겨 가지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중시하는 라이프 싸이클이 문제될 이유도 당연히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회라는 공동체 속에서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싫든 좋든 타자와 관계 맺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이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관계맺기에서 나의 본모습 혹은 내면은 어느 만큼 상대방에게 드러내야 할까요? 바꿔 말하면, 나와 타자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합당할까요? 사실 현대인이 타자와의 관계를 어려워하는 큰 이유 중의 하나가 여기에 있어 보입니다. 표면적 관계를 넘어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본모습을 일정 정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데, 여기에는 혹 예기치 않은 관계의 파탄으로 인해 자신이 상처 입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 수반됩니다. 기꺼이 속마음을 공유하고 자신의 ‘비밀’마저 함께 나누었던 긴밀한 관계가 파탄으로 끝나게 될 경우, 그 상처는 회복하기 어려운 트라우마가 될 수 있습니다. 이후의 새로운 관계맺기는 더욱 어렵게 되겠지요.
실제 대학에서 이루어지는 학생 상담 내용의 상당 비율을 교우관계 및 대학생활 부적응 문제가 차지합니다. 졸업 후 사회에 진출한 후에도 직장동료와의 관계 불화로 인해 어렵게 입사한 회사의 퇴사를 고민하는 사례들을 빈번히 보게 됩니다. 또한 우정과 사랑은 그 결실의 달콤함만큼이나 실패의 극심한 후유증과 고통을 동반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맺기를 통해 ‘세상’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상처받을 여지를 아예 없애기 위해 타자와 유대를 구축하기 위한 시도 자체를 최소화해야 할까요. 타자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는 ‘진정성’과 ‘나’를 최대한 감추는 ‘신중함’ 사이에서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할까요? 수월하면서도 신뢰를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맺기의 방법과 태도는 무엇일지,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2) 혼네와 다테마에
여러분도 잘 아시는 일본문화의 특징 중에 ‘혼네(本音)’와 ‘다테마에(建前)’가 있습니다. 통상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진짜 속마음인 본심을 ‘혼네’라 부르고,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형식적 표현을 ‘다테마에’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혼네는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 사이에서, 다테마에는 회사나 공식적 자리에서 각각 관계 및 장소를 분리해 사용된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일본의 회사에서 어느 사업기획 제안에 대해 “한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한번 살펴보겠습니다.”라고 답했다면, 대체로 그것은 긍정도 판단 유보도 아니라 완곡한 표현을 통한 사실상의 거절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혼네와 다테마에 그 자체가 아닙니다. 본심과 사회적 표현을 분리해 사용하는 문화적 풍토로 인해 속마음, 즉 자신의 내면을 쉽게 털어놓을 수 없게 하는 일종의 억압이 의식과 무의식 양측에서 모두 작동한다는 점이야말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즉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공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솔직하고 진솔하게 심경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쿨하지 못하고 무언가 부담스럽다고 인식하는 풍토가 점차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본심과 겉모습이 나뉘는 것은 비단 일본만의 문화가 아닐 수 있으며, 일본 사람들이라 해도 명확히 양자가 구분되지 않는 경우 또한 적지 않다는 것이 제 경험입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인은 의견이나 기분을 다이렉트하게 표현하는 반면 일본인은 완곡하게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하는 이분법적인 한일 비교문화론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솔직하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기 어려운 분위기의 확산은 한국과 일본 불문하고 현대 사회의 특징이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3) 진짜 ‘나’를 드러내는 것의 딜레마
한국의 영화감독 김지운의 대표작 《달콤한 인생》(2005)에는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 있습니다. 이병헌이 주인공을 연기하는 이 영화에서 주인공 선우는 폭력조직 보스 강사장의 충실한 심복으로서 신뢰받는 부하입니다. 강사장은 해외 출장을 떠나며 선우에게 자신의 젊은 여대생 애인이 다른 남자를 몰래 만나지는 않는지 감시하라는 지시를 남깁니다. 그리고 혹 밀회가 발각되면 자신에게 바로 연락을 하든가, 아니면 직접 처단하라고 명령합니다. 하지만 선우는 신민아가 연기하는 애인의 밀회를 적발했음에도 강사장의 명령과는 달리 모른 체 해줍니다. 오직 다시는 밀회하지 말라는 당부 같은 지시를 남길 뿐입니다.
 이때부터 선우의 고난이 시작됩니다. 강사장은 다른 부하를 통해 선우를 잡아들여 고문하고 포박한 끝에 이렇게 묻습니다. “왜 내 지시를 따르지 않았냐?” 선우는 대답합니다. “밀회하는 두 사람이 헤어져 다시 만나지만 않는다면 모두 다 괜찮을 줄 알았습니다.” 그러자 강사장이 다시 말합니다.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이야기해 봐.”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선우는 대답하지 못합니다. 숨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자신도 ‘진짜 이유’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서는 그러합니다.
선우가 ‘진짜 이유’를 깨닫게 되는 것은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서입니다. 죽어가는 그의 의식 속에 아련히 떠오르는 한 장면이 그 ‘진짜 이유’를 알려줍니다. 강사장에 대한 복수를 마친 후 자신 또한 죽음을 목전에 두었을 때 비로소 그는 자신의 진심이자 내면이었던 ‘진짜 이유’를 대면하게 됩니다. 그것은 첼로를 연주하는 신민아의 모습에 매혹된 자신의 마음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던 황홀하고 ‘달콤한’ 기분으로 충만해진 선우의 표정이 오롯이 진실을 말해 줍니다. 찔러도 피 한방울 나지 않을 것 같던 냉철한 조직원의 마음에 바람을 일으켜 그를 죽음으로 인도한 것은 결국 ‘매혹’이었습니다. 그는 죽음과 맞바꿔 자신의 내면, 즉 본심을 발견함으로써 일종의 ‘자아’를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맺기에서 자신의 본심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의 자극으로 인해 자신의 본심을 발견하게 되는 흥미로운 사례를 인정할 수 있습니다. 즉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는 진심이라는 것은 그것을 속마음이라고 부르든 아니면 비밀이라고 부르든, 처음부터 당연한 듯이 내면에 항상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타자와의 관계맺기에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발견하고 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보스인 강사장은 분명히 ‘나’를 이미 정립한 사람입니다. 7년을 개처럼 충직하게 당신을 따랐던 나에게 ‘왜’ 이렇게까지 하느냐는 선우의 분노에 찬 질문에 강사장은 이렇게 답합니다. “너는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즉 애인의 외도 사실을 보고하지 않은 선우의 선택이 배신이 아니라 수치심과 모욕감으로 다가왔음을 그는 보스 대 부하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계급장 떼고’ 고백하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강사장과 선우 관계의 파탄은 자신의 마음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과 아직 자신의 진심을 발견하지 못한 사람 사이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비극이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만큼 진짜 ‘나’를 발견하고, 나아가 그것을 타자와의 관계맺기에서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일본의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마음(こゝろ)』(1914) 또한 매우 흥미롭고 중요한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사람의 ‘마음’에 대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 ‘선생’은 도쿄대학 출신의 지식인이지만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세상을 등진 채 아내와 더불어 조용히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비밀이 있습니다.
 아내와 결혼하기 전 선생은 지금은 작고한 장모의 집에서 친구 K와 함께 하숙을 하던 대학생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에 ‘아가씨’라 불렀던 아내를 내심 흠모하면서도 고백을 주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서로 흉금을 터놓을 수 있는 사이였던 절친 K가 선생에게 아가씨를 좋아한다고 말하며 곧 고백을 하겠다고 털어놓습니다. 선생은 충격에 빠집니다. 예기치 않은 사랑의 삼각관계에서 절친에게 선수를 뺏긴 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선생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하숙집 부인을 찾아가 아가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청혼을 합니다. 고백도 주저하던 그가 무려 청혼을 감행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K는 뒤늦게 아가씨에 대한 마음을 고백하지만, 이미 도쿄대학생으로 전도유망했던 선생과 딸의 혼인을 결정한 부인에게 그의 마음은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은 절친 선생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한 충격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며칠 후 K는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하지만 편지에는 친구에 대한 어떠한 원망의 글귀조차 없었습니다.
그 이후 선생은 아가씨와 결혼하였지만, 그의 삶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고독하고 어두운 그림자로 뒤덮이게 되었습니다. K는 그를 원망하지 않고 떠나갔지만 선생의 마음은 이제 죄의식과 자기혐오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혹독한 형벌은 눈덩이처럼 불어난 마음의 비밀을 그 누구와도 더더욱 나눌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선생의 삶은 그저 고독하고 스산할 뿐입니다.
액자식 구성의 소설 『마음』에서 선생의 진실은 자신을 스승처럼 따르는 대학생 ‘나’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통해 밝혀집니다. 끝까지 아내에게는 마음의 비밀을 나누지 않습니다. 이처럼 나의 마음을 오롯이 드러내는 고백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나의 진심을 제때 그 상대자에게 표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고뇌는 더 큰 내면의 갈등과 관계의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진심을 토로하는 고백 자체가 관계의 모든 불확실성을 해소하는 만병통치약이 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선생은 과연 자신의 진심을 고백한 것이라고 봐야 할까요, 아닐까요? 우리는 나와 마주하게 되는 그 누군가에게 나의 마음을 드러내어야 할까요, 아닐까요? 과연 우리는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4) 사랑과 신뢰: 궁극의 관계맺기
나라는 주체가 타자와 관계를 맺는 궁극의 형태로서 ‘사랑’을 들 수 있겠습니다. 사랑을 통해 관계맺기를 사유하는 한 방법으로서 ‘신뢰’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사랑과 신뢰는 접점과 차이점을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도 사랑받기도 참으로 어렵다는 요즘, 사랑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사랑과 신뢰는 다릅니다. 사랑을 애정, 매혹, 끌림 그 무엇으로 정의하든, 사랑과 신뢰는 다른 것입니다. 사랑이 신뢰를 담보하지도 않으며, 신뢰가 사랑을 수반하지도 않습니다. 둘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좋습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끌림’입니다. 신뢰에까지 다다를 수도 있고, 그 전에 좌초될 수도 있습니다. 사랑과 신뢰가 일방적이거나 과잉이었을 경우의 비극적 사례를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이른바 ‘맹목적 사랑’의 비극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곧 신뢰라고 믿게끔 하는 마력이야말로 사랑의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애당초 맹목적이며, 사랑에 빠진 이는 기꺼이 눈뜬 장님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건부의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신뢰는 곧 믿음입니다. 신뢰는 한 번에 쌓이지 않습니다. 신뢰는 매혹이 아닙니다. 경험의 축적 없이 신뢰는 구축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지 않아도 신뢰할 수는 있습니다. 물론 신뢰가 쌓여 사랑으로 발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둘은 상이한 것입니다. 혹 찰나의 만남으로도 믿음이 생기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신뢰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하기에 모든 걸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입니다. 매혹과 끌림의 정동으로 넘쳐나는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사랑하기에 그냥 믿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은 거는 것입니다. 깨어지더라도 버려지더라도 자신의 존재를 던져 거는 것입니다. 결과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의 본질은 자기만족이지만, 궁극의 만족감을 맛보기 위해선 두려움을 넘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자신을 경계 바깥으로 내던져야 합니다. ‘내던져짐’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혼자만의 사랑’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이 이루어지든 아니든, 사랑이 주체인 ‘나’의 성장과 성숙을 견인한다는 것은, 맞는 말입니다. 사랑의 힘으로 경계 밖으로 자신을 내던지고 자신을 표현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세계’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경계 밖으로 자신의 의지를 발신했음에도 응답받지 못했을 때, 사랑은 ‘외사랑’이 됩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미 충분합니다. 소유/소통에 대한 욕망과 끝없는 결핍/갈급이야말로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외로움, 즉 고독이야말로 사랑의 진수이기 때문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고 했지만, 이는 절반만 옳습니다. ‘그대가 곁에 있기에 더욱 그대가 그립다’가 더욱 사랑의 본질에 부합합니다. 사랑하기에 더 외로운 것입니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흔한 유행가 가사를 사랑을 저버린 자의 비겁한 자기변명, 노회한 자기정당화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게 그러하듯 사랑은 아무 때나 찾아오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신뢰를 가지기는 불가능에 가깝지만 무작정 사랑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것이 두근거림이든 충만함이든, 자기 삶의 일상성을 뒤흔드는 매혹의 바람이 불어올 때는 기꺼이 맞아 볼 가치가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훈풍일지도 모릅니다. 나와 그대가 맞닿을 유일한 순간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랑을 기다리는 자는 무릇 마음을 활짝 열어 두어야 합니다. 그 떨림이 신호임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 보아야 합니다.
 설사 사랑이 신뢰로 발전하지 않는다 해도 낙담해선 곤란합니다. 사랑이 신뢰가 되기 위해서는 최초의 설렘과는 이질적인 겹겹의 시간이 쌓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과 신뢰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사랑에서 출발해 믿음에 다다르는 것만이 모범답안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입구가 어느 곳이든, 그 계기가 무엇이든, 지금 내가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고 싶고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상태라면, 이미 조건은 충분합니다. 바로 지금 나를 그쪽으로 내던져야 합니다.

(5) 세상으로 나아가기: “Don't be afraid”
이제까지 말씀드린 ‘사랑’이 남녀의 사랑 같은 좁은 의미의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은 충분히 이해해 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우정이어도 좋고, 새로운 목표나 세계에 대한 도전이어도 좋습니다. 결국 나를 활짝 열어 두고, 들여다보고, 그리고 내던져야 한다는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즉 무언가와 관계 맺기 위해서는 나를 내 속에만 남겨 두어서는 곤란합니다. 나는 소중하지만, 소중하기 때문에 더더욱 나의 울타리 밖으로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일은 항상 두렵습니다. 애써 표현한 나의 진심과 열정이 외면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능성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합니다. 불안과 희망 사이에서 서성입니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부터 움직여야 합니다. 신중하되 과감한 첫걸음을 떼어야 합니다. ‘나’라는 자아를 걸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함께 하는 이 순간, 이 장소가 바로 그 출발점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JAPAN

世界とわたし: 他者と関係を結ぶということ

李志炯
(淑明女子大学 日本学科)

(1) 関係づくりの重要性と難しさ
他者との「関係づくり」に苦しむ現代人が増えています。特に若者の間では、友人や同僚などとの人間関係における難しさや居心地の悪さを訴える人が少なくありません。「ひきこもり」 「独り飯(ホンバプ)」 「独り受講(トッカン)」などは、その分かりやすい例と言えるでしょう。社会的な隔離を余儀なくされたコロナ禍を経て、このような様相はさらに深化しました。もちろん、自分一人の時間を自発的に楽しむ人も少なくありません。自分だけの時間や空間を重視するライフサイクル自体は、何ら問題視される理由はありません。しかし問題は、社会という共同体の中で生き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現代人にとって、好むと好まざるとにかかわらず、他者と関わらずに生きていける人はいないという事実です。
 それでは、関係づくりにおいて、自分の本来の姿や内面はどの程度まで相手にさらけ出すべきなのでしょうか。言い換えれば、自分と他者との距離はどのくらいが適切なのでしょうか。実のところ、現代人が他者との関係を難しく感じる大きな理由の一つは、この点にあるように思われます。表面的な関係を超えて親密な関係を維持するためには、自分の本来の姿をある程度は明かさざるを得ません。しかしそこには、予期せぬ関係の破綻によって自分が傷つくかもしれないという恐れが伴います。喜んで本音を共有し、自分の「秘密」さえ分かち合っていた親密な関係が破綻に終わった場合、その傷は容易には癒えないトラウマとなり得ます。そしてその後の新たな関係づくりは、いっそう困難になることでしょう。
 実際、大学で行われている学生相談の内容の相当な割合を、友人関係や大学生活への不適応の問題が占めています。卒業後に社会へ進出してからも、職場の同僚との不和により、ようやく入社した会社を辞めるべきか悩む事例が頻繁に見られます。また、友情や愛は、その実りの甘さと同じほどに、失敗した際には深刻な後遺症や苦痛を伴うこともあります。それでは、私たちは他者との関係づくりを通して「世界」の一員となるために、どのように生きていけばよいのでしょうか。傷つく可能性を完全になくすために、他者との絆を築こうとする試みそのものを最小限に抑えるべきなのでしょうか。他者に「自分」をさらけ出す「真摯さ」と、「自分」をできるだけ隠す「慎重さ」とのあいだで、私たちはどのような選択をすべきなのでしょうか。無理なく、しかも信頼を育み合うことのできる関係づくりの方法や態度とは何か、ぜひ考えてみたいものです。

(2) 本音と建前
 日本文化の特徴として挙げられるものの一つに皆さんもよくご存じの「本音(ほんね)」と「建前(たてまえ)」があります。一般に、表には出さない本当の気持ちを「本音」と呼び、社会的関係を維持するための形式的な表現を「建前」と呼びます。そのため、本音は家族や親しい友人との間で、建前は会社や公式の場で、というように、関係や場面を分けて使われると言われています。例を挙げてみましょう。日本の会社で、ある事業企画の提案に対して「一度検討してみます」「一度目を通してみます」といった返答がなされた場合、それは多くの場合、肯定でも判断保留でもなく、婉曲的な表現による事実上の断りを意味すると言われています。
 しかし、ここで注目したいのは、本音と建前そのものではありません。本心と社会的な表現とを分けて用いる文化的風土によって、胸の内、すなわち自分の内面を容易に打ち明けることができなくなる、いわば一種の抑圧が、意識と無意識の両面で働いているという点こそ、私たちが注目すべき部分だと考えます。つまり、私たちの社会では、知らず知らずのうちに、公的領域だけでなく私的な生活においても、率直かつ誠実に自らの心情を直接的に表現することは、どこかクールではなく、何かしら重たいもの、負担を伴うものだと受け止める風潮が、次第に根づきつつあるのです。
 その点から見ると、本心と表向きの姿が分かれるのは、必ずしも日本だけの文化で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私の経験からも、日本人であっても明確に両者が区別されない場合は少なくありません。ですから、韓国人は意見や気持ちをストレートに表現し、日本人は婉曲的・間接的に表現する傾向が強い、という二分法的な日韓比較文化論を、私はあまり信頼していません。むしろ、自分の本心を率直に明かしにくい雰囲気の広がりは、韓国・日本を問わず、現代社会の特徴だと見る方が妥当だと思われます。

(3) 本当の‘自分’をさらけ出すことのジレンマ
 韓国の映画監督キム・ジウンの代表作『甘い人生』(2005)には、非常に興味深い設定があります。イ・ビョンホンが主人公を演じるこの映画で、主人公のソヌは暴力団のボスであるカン社長の忠実な腹心として、厚い信頼を寄せられている部下です。カン社長は海外出張へ向かう際、ソヌに対し、自分の若い愛人(女子大生)が他の男と密会していないか監視せよとの指示を残します。そして、もし密会が発覚した場合は、自分にすぐ連絡するか、あるいは自ら処断せよと命じます。しかし、ソヌはシン・ミナが演じる愛人の密会を突き止めたにもかかわらず、カン社長の命令とは異なり、見て見ぬふりをしてやります。ただ、「二度と会わないように」という、頼みごとのような指示を残すだけでした。
ここからソヌの苦難が始まります。カン社長は別の手下を使い、ソヌを連行して拷問し、拘束した末にこう問いかけます。 「なぜ、私の指示に従わなかった?」  ソヌは答えます。
「密会していた二人が別れ、二度と会わないのであれば、すべてうまくいくと思っていました」  すると、カン社長が再び問い詰めます。
「そんなことではなく、本当の理由を言ってみろ」と。
 しかし、ソヌは答えることができません。隠しているのではなく、本当に自分でも「本当の理由」が分からないからです。少なくとも、この時点では。
 ソヌが「本当の理由」に気づくのは、映画の終盤に至ってのことです。死にゆく彼の意識の中に淡く浮かび上がるある場面が、その「本当の理由」を教えてくれます。カン社長への復讐を終え、自分自身も死を目前にした時、彼はようやく自分の本心であり内面であった「本当の理由」と対峙することになります。それは、チェロを演奏するシン・ミナの姿に魅了された自分の心です。一度も経験したことのない、うっとりとするような「甘い」気分に満たされたソヌの表情が、すべてを物語っています。刺しても血の一滴も出ないような冷徹な組織員の心に風を送り込み、彼を死へと導いたのは、結局「魅惑」でした。彼は死と引き換えに自分の内面、すなわち本心を見出すことで、ある種の「自己」を獲得す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
 ここで私たちは、他者との関係づくりにおいて自分の本心を「隠す」のではなく、むしろ他者からの刺激によって自分の本心を「発見」するという興味深い事例を認めることができます。つまり、「私」という主体を構成する本心というものは、それを「本音」と呼ぼうが「秘密」と呼ぼうが、最初から当然のように内面に常に存在しているわけ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したがって、他者との関係づくりにおいて「私」をさらけ出すためには、まず「私」を発見し、定立し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事実に気づかされるのです。
 そういう点から見れば、ボスであるカン社長は、「私」をすでに確立した人物だと言えます。
「7年間、犬のように忠実に従ってきた私に対し、なぜここまで残忍になれるのか」というソヌの怒りに満ちた問いに対し、カン社長はこう答えます。
 「お前は、私に屈辱を与えた」
つまり、愛人の不倫を報告しなかったソヌの選択を、単なる裏切りではなく、羞恥心と屈辱として受け取ったのです。彼はボスと部下としてではなく、人間対人間として「肩書を外し」、自らの心情を告白しているわけです。
 したがって、カン会長とソヌの関係の破綻は、自分の本心を認められる人と、まだ自分の本心を発見していない人の間で起こるしかなかった、必然的な悲劇であったと評価する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それほどまでに、本当の「私」を発見し、さらにはそれを他者との関係づくりにおいて「ありのままの私」としてさらけ出すということは、実に困難なことなのです。
 同じ文脈で、日本の国民的作家、夏目漱石の小説『こころ』(1914)も非常に興味深く、重要な作品です。タイトルが示す通り、人の「心」に関する小説だからです。主人公である「先生」は東京大学出身の知識人ですが、特別な職に就くこともなく、世間に背を向けて妻と二人で静かに暮らしている人物です。彼には、愛する妻にさえ打ち明けられない秘密があります。
 妻と結婚する前、先生は亡くなった義母の家で友人であるKと共に下宿をしていた大学生でした。彼は当時「お嬢さん」と呼んでいた今の妻を内心慕いながらも、告白をためらっていました。ところが、唯一互いに胸襟を開くことのできる間柄だった親友のKが、先生にお嬢さんのことが好きで、近いうちに告白するつもりだと打ち明けます。先生は衝撃を受けます。予期せぬ恋の三角関係において、親友に先手を打たれた格好になったからです。そして先生は何かに憑りつかれたかのように下宿の奥さんを訪ね、お嬢さんと結婚したいとプロポーズをします。告白さえためらっていた彼が、驚くことに、求婚を敢行したのです。
 何も知らないKは、後になってお嬢さんへの想いを告白しますが、すでに東京大学生で前途有望だった先生と娘の婚約を決めていた奥さんに、彼の想いが受け入れら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自分の真心を打ち明けた親友に、裏切りともいえる仕打ちを受けた衝撃のためかは分かりませんが、その数日後、Kは一通の手紙だけを残してこの世を去ります。しかし、その手紙には、友人に対するいかなる恨みの言葉も記されていませんでした。
 その後、先生はお嬢さんと結婚しましたが、彼の人生はそれ以前とは全く異なる、孤独で暗い影に覆われることとなりました。Kは彼を恨むことなく去っていきましたが、先生の心は今や罪悪感と自己嫌悪で満たさ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何よりも過酷な刑罰は、雪だるまのように膨れ上がった「心の秘密」を、誰とも分かち合うことがますますできなくなったという事実でした。先生の人生は、ただ孤独で荒涼としたものに過ぎなく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
 枠構造の小説『こゝろ』において、先生の真実は、自分を師のように慕う大学生の「私」へ送る最後の手紙を通じて明かされます。最後まで妻には心の秘密を分かち合う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このように、己の心をありのままにさらけ出す告白というものは、実に難しいものです。しかし、自分の真心を機を逃さずその相手に伝えられないことから生じる苦悩は、さらなる内面の葛藤と関係の悲劇を招きかねません。かといって、真心を吐露する告白そのものが、関係におけるすべての不確実性を解消する万能薬になるという保証もないのです。 果たして先生は、自分の真心を告白したと言える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言えない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自分と向き合うことになる誰かに対し、己の心をさらけ出すべきな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そうすべきではないのでしょうか。果たして私たちは、これらの事例を通じて何を学ぶべきなのでしょうか。

(4) 愛と信頼: 究極の関係づくり
「私」という主体が他者と関係を結ぶ究極の形として、「愛」を挙げ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愛を通じて関係づくりを思索する一つの方法として、「信頼」を共に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愛と信頼は、接点と相違点を併せ持っているからです。愛することも愛されることも実に困難だと言われる昨今、果たして愛とは何なのでしょうか。
 愛と信頼は異なります。愛を愛情、魅惑、惹かれ合う心、その何と定義しようとも、愛と信頼は別物なのです。愛が信頼を担保するわけでもなく、信頼が愛を伴うわけでもありません。両者は別個のものと考えるほうが賢明でしょう。愛は基本的に「惹かれ(引き付けられ)ること」です。信頼にまで至ることもあれば、その前に座礁することもあります。愛と信頼が一方的であったり、過剰であったりした場合の悲劇的な事例を、私たちはよく知っています。いわゆる「盲目的な愛」の悲劇です。しかし、それにもかかわらず、愛がすなわち信頼であると信じ込ませる魔力こそが、愛の力だとも言えるでしょう。愛はそもそも盲目的であり、恋に落ちた者は喜んで「目明きの盲(めあきのめくら)」になるからです。条件付きの愛は、愛ではありません。
 信頼とはすなわち「信じること」です。信頼は一度に築かれ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信頼は魅惑ではないのです。経験の蓄積なしに、信頼が構築されることはありません。愛していなくても信頼することは可能です。もちろん、信頼が積み重なって愛へと発展することもあるでしょう。しかし、両者は相異なるものです。もし、刹那の出会いであっても信じられる誰かがいるとするならば、それはもはや信頼ではなく「愛」です。愛しているからこそ、すべてを信じて託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それは魅惑と惹かれ合う情動(アフェクト)に満ちあふれた愛です。愛しているから、愛しているがゆえに、ただ信じるのです。
 そういう意味で、愛とは「懸ける」ものです。たとえ打ち砕かれ、捨てられたとしても、己の存在を投じて懸けるものなのです。結果を恐れるのであれば、それは愛ではありません。愛の本質は自己満足ですが、究極の満足感を味わうためには、恐怖を越えてリスクを負わなければなりません。自分自身を境界の外側へと投げ出すべきなのです。「投げ出されること」なしには、何も始まりません。せいぜい「独りよがりの愛」に留まるだけです。その点において、愛が成就するか否かにかかわらず、愛が主体である「私」の成長と成熟を牽引するというのは正しいと言えるでしょう。愛の力で境界の外へと自分を投げ出し、自分を表現する瞬間、私たちは初めて「世界」の一員になれるのです。
 境界の外へと自分の意志を発信したにもかかわらず、それに応答が得られなかった時、愛は「片思い」となります。成し遂げられぬ愛です。しかし、それでいて十分なのです。所有や疎通への欲望、そして終わりのない欠乏と渇望こそが、愛の本質だからです。寂しさ、すなわち「孤独」こそが愛の真髄だからです。詩人のリュ・シファは「君がそばにいても、僕は君が恋しい」と言いましたが、これは半分だけが正解です。「君がそばにいるからこそ、いっそう君が恋しい」とするほうが、より愛の本質に合致しています。愛しているからこそ、より孤独なのです。「愛しているから去る」というありふれた歌の歌詞を、愛を捨てた者の卑怯な自己弁護や、老獪な自己正当化としてのみ片付けられない理由が、ここにあります。
 すべてのことがそうであるように、愛はいつでもやってく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最初から信頼を持つことはほぼ不可能ですが、ただ無条件に愛することは可能です。それが胸の高鳴りであれ、満たされる感覚であれ、自分の生活の日常性を揺るがす魅了の風が吹いてくるときは、喜んで受け入れる価値があります。もしかすると、それが最初で最後のそよ風かもしれません。私とあなたが触れ合う唯一の瞬間かもしれません。
 したがって、愛を待つ者は、心を大きく開いておくべきです。そのときのときめきが信号であることに気づけるように、自分の心を静かに見つめる必要があります。たとえ愛が信頼に発展しなくても、落胆してはいけません。愛が信頼になるためには、最初のときめきとは異質な、幾重もの時間の積み重ねが必要だからです。だからこそ、愛と信頼は基本的に異なるものなのです。愛から出発して信頼に至ることだけが模範解答とは限りません。入口がどこであれ、そのきっかけが何であれ、今、自分が誰かと心を分かち合いたいと思い、心を分かち合える状態であるなら、それだけで十分に価値があります。まさに今、自分をその相手の方へ投げ出すべきなのです。

(5) 世界へ踏み出すこと: “Don’t be afraid!”
 これまで申し上げた「愛」が、男女の愛といった狭い意味での愛のみを指すのではないことは、十分に理解していただけたことと思います。それが友情であってもよく、あるいは新たな目標や世界への挑戦であっても構いません。結局のところ、自分を大きく開き、見つめ、そして投げ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点では、すべて同じだからです。つまり、何かと関係を結ぶためには、自分を自分の中にだけ留めておいてはならないのです。自分という存在は大切ですが、大切だからこそ、なおさら自らの囲いの外へと踏み出すべきなのです。
 しかし、未知の世界に向かって進むことは、常に恐ろしいものです。せっかく表現した自分の真心や情熱が、拒絶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不安になり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可能性と不確実性の間で苦悩し、葛藤します。不安と希望の間で立ち止まり、行ったり来たりするのです。しかし、「やりたいこと」を「できること」へと変化させるためには、自分自身がまず動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慎重でありながらも、果敢な第一歩を踏み出すべきです。「私」という自我を懸けるのです。

今、私たちが共にしているこの瞬間、この場所が、その出発点かもしれません。
皆さんは、どうされます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