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우리 사회의 남녀평등은 충분한가?

이지형
(숙명여대 일본학과)

1. 오늘의 주제
안녕하세요, 한일 대학생 여러분.
캠프도 거의 막바지네요. 이제는 서로 많이 교류하고 더 많이 친해지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특강은 ‘우리 사회의 남녀평등은 충분한가?’라는 주제로 말씀드려 보려 합니다. 흔히 ‘평등’은 한 사회의 근대화, 민주화 정도를 가늠하는 대표적 지표로 거론됩니다. 평등이 구현되지 않은 경우, 그것은 곧 상대적 약자에 대한 불평등이자 차별이 되지요. 남녀평등, 흑백평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여성차별, 흑인차별로 부르는 것이 그 일례입니다. 특히 여성차별은 유대인차별과 더불어 인류 역사상 가장 뿌리 깊은 차별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따라서 오늘 주제는 ‘우리 사회의 여성차별은 충분히 개선되었는가’로 바꿔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한국과 일본, 일본과 한국 사회의 여성차별은 과연 과거에 비해 충분히 개선되었을까요? 여러분들은 개인적으로 여성으로서 (혹은 남성으로서) 차별을 경험한 적은 없으신지요? 차별 개선에 여전히 미흡한 점이 있다면 그 개선책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한일 양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젊은이 여러분들의 솔직한 의견 개진과 활발한 소통을 기대하며 특강을 시작하겠습니다. 다소 묵직한 이야기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2. 한국과 일본의 남녀평등 현황
1980년대에 큰 인기를 모은 한국의 TV프로그램 중에 《아들과 딸》이라는 연속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드라마의 주인공은 시골 출신의 남녀 쌍둥이입니다. 쌍둥이 중에 아들의 이름은 귀남(貴男), 딸의 이름은 후남(後男)이었습니다. 남아(男兒)선호 사상이 특히 강했던 한국 사회에서 아들과 딸, 즉 남성과 여성을 대하는 태도의 차이를 두 사람의 이름에서 쉽게 가늠할 수 있습니다. 아들은 귀한 남성(貴男)인 반면에 딸은 그저 남성의 그림자(後男)에 불과합니다. 부모는 아들을 서울의 대학에 보내 출세를 기원하지만, 아들 이상으로 공부를 잘 하는 딸에게는 고교 이상의 진학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성의 장래 희망이 대부분 ‘현모양처’였던 1960~70년대에 대학에 진학하는 여성이 많지 않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집을 뛰쳐나온 딸은 직장을 다니며 자력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커리어우먼으로 성공합니다. 대신 집안의 기대를 모은 아들은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채 평범한 회사원으로 낙담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전통적 남아선호 사상은 가정에서도 뿌리 깊었던 남녀차별의 다른 얼굴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의 남녀 차별 양상은 이후 대부분 개선되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영화로도 화제가 된 조민주의 소설 『82년생 김지영』(2016)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1982년에 태어난 30대 중반의 여성 김지영이 성장 과정과 사회에서 겪는 불이익과 차별이 주인공의 관점에서 섬세하게 그려집니다. 그녀는 가정에서는 남동생에게 우선권을 양보하고, 어렵게 취업한 회사에서는 성희롱을 당하고, 결혼 후에는 아이를 위해 자신의 직장과 꿈을 포기하게 됩니다. 남편이 어떻게든 그녀를 ‘도우려 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사와 육아는 오롯이 김지영의 몫이 됩니다. 심지어 그녀의 원치 않은 전업주부의 삶은 사회 일각에서 ‘맘충’으로 불리며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 속에서 김지영의 마음과 몸은 점차 허물어져 갑니다. 이렇게 보면 21세기에도 여성의 삶은 표면적으로 보이는 것과 달리 그 어머니 세대와 본질적으로 바뀐 것이 없어 보입니다. 이 소설이 일본에서도 번역돼 선풍적인 붐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일본의 여성들 또한 김지영이 겪는 다양한 차별과 불평등에 크게 공감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한국과 일본의 실제 남녀평등 실태는 어떠할까요? 주관적 평가를 배제하기 위해 공신력 있는 기관의 객관적 지표를 인용해 볼까 합니다. 각국의 남녀평등 현황을 확인할 때 가장 많이 인용되는 자료는 세계경제포럼(WEF)과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매년 발표하는 남녀평등지수입니다. 먼저 세계경제포럼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24년은 94위, 2025년 101위였습니다. 일본은 어떠할까요? 일본은 2024년 118위, 2025년에도 동일한 118위입니다. 한국과 일본 모두 최하위권에 위치합니다. 한일 양국의 경제 규모나 문화 수준에 비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낮은 순위임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유엔개발계획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2025년에 175개 중 12위, 일본은 22위로 양국 모두 상당히 높은 순위에 있습니다. 두 지표 사이의 현격한 격차는 무엇 때문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세계경제포럼과 유엔개발계획이 각각 남녀평등지수를 산출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세계경제포럼의 성별 격차지수는 국가의 절대적 수준과 상관없이 남녀 간 격차가 적을수록 높은 점수를 부여합니다. 이에 반해 유엔개발계획의 성불평등지수는 남녀 간 격차 이외에도 국가의 절대적 발전 수준도 반영합니다. 그래서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경제규모, 보건, 교육 등에서 기본 지표가 우수한 일본과 한국이 높은 순위를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남녀 간 임금격차, 기업 및 공공기관의 고위직 여성 비율 등의 섬세한 상대적 지표를 반영하는 세계경제포럼 순위에서 한일의 순위는 매우 낮습니다. 이는 일본과 한국이 양적으로는 선진국임에도 불구하고 세부적인 질적 측면에서 여전히 남녀평등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는 성차별 국가임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여성이 일정 수준 이상의 직위로 승진하는 데는 큰 차별과 제약이 따른다는 이른바 ‘유리천장(Glass ceiling)’이 그 대표적 예시입니다. 한국과 일본의 유리천장 지수는 ‘선진국 클럽’으로 불리는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입니다. 밖에서 보는 것 이상으로 여성차별의 벽은 여전히 강고하고 남녀평등의 길은 험난합니다.
3. 차별과 구별은 다르다?!
한국 속담에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있었지요. 가정에서 여성의 간섭이 지나치고 여성이 주도권을 쥐게 되면 집안이 순탄하지 않다는 의미로 통상 이해되는 이 속담의 유래는 의외로 오래되었습니다. 고려 시대 역사서 『고려사』에 기록된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면 반역의 징조”라는 고사에서 비롯된 이 속담은 원래 음양의 균형이 깨지면 집안에 변고가 생긴다는 의미였다고 합니다. 당초는 균형 즉 조화에 포인트가 있었지 암탉에 초점이 맞춰진 것은 아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남성 중심의 가부장주의가 성행했던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여성의 발언권과 역할을 제한하는 여성 차별적 표현으로 통용되게 됩니다. 지금에서야 여성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 찬 시대착오적 속담으로 치부되지만, 이러한 개선된 인식이 정착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울어라! 암탉아” 1998년 서울의 어느 여자대학이 내건 대학홍보 카피 슬로건입니다. 당시 세간에 큰 화제를 모았던 이 카피는 실은 교내에서조차 반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대학의 교육이념에 ‘정숙’이 포함되어 있음을 감안하면 반대 의견의 배경을 추정할 수 있겠지요. 다행히 이 카피는 98년 대한민국 광고대상을 수상하는 등 남녀평등 시대를 선도하는 슬로건이 되었습니다. 이 문구와 함께 ‘나와라! 여자대통령’, ‘뛰어라! 청개구리’ 등의 카피도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의 전환과 해묵은 고정관념의 해체를 선언한 슬로건이었습니다. 이는 바꿔 말하면 21세기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도 여성에 대한 편견과 상대적 차별이 여전히 굳건하였음을 방증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근대사는 여성해방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민주주의의 고향’으로 불리는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선거권/피선거권)이 부여된 것은 1928년에 이르러서였습니다. 미국은 1920년, 프랑스는 1944년입니다. 근대국가에서 남성에게 대부분 19세기 초중반에 참정권이 부여된 것을 감안하면 현격한 시간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본과 한국은 어떠할까요? 일본은 1945년 아시아태평양전쟁 종전 이후, 한국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에서야 비로소 여성의 참정권이 보장되었습니다. 평등을 기치로 하는 근대에서조차 왜 이토록 여성의 정당한 정치권리 행사가 보장받기 어려웠을까요? 보통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그 기준점으로 하는 ‘근대’ 이후 크게 변모한 분야 중의 하나는 바로 교육입니다. 이른바 ‘국민’을 대상으로 의무교육이 실행됩니다. 여성 또한 교육의 대상이 되어 여학교 등을 중심으로 근대 교육을 받게 됩니다. 다만 여성교육의 목적은 ‘현모양처’로 여성을 양성하는 데 있었습니다. 즉 ‘현명한 어머니인 동시에 훌륭한 아내’가 근대 여성에게 제시된 진로였습니다. 평등이 시대의 화두가 아니었던 근대 이전, 남녀의 관계를 규정하는 이론은 ‘남성우위론’이었습니다. 신체와 정신 능력 보두 남성이 여성보다 절대적 우위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평등이 기치인 근대에서 남성의 일방적 우위를 당연시하는 주장은 시대정신에 걸맞지 않게 됩니다. 이에 발맞춰 나온 이론이 ‘남녀성차론’입니다. 남녀는 성적 차이(性差)가 있기에 각기 뛰어나고 적합한 능력과 소질의 영역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남성은 이성적이고 여성은 감성적이라는 갈라치기 논리가 등장합니다. 지금조차도 고정관념으로 은연중에 강하게 작동하는 인식이기도 하지요. 이 논리에 따르면, 남성은 이성이 뛰어나기에 정치, 행정 등의 사회 활동에 적합하고, 여성은 감성이 발달했기에 내조, 육아 등의 가정 활동이 더 어울린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차별의 논리가 그만큼 더 교묘해진 것입니다. 근대 일본의 유명한 문구, ‘남자는 집밖, 여자는 집안’(男は外、女は内)이 바로 그것입니다. 과학 이론이라는 명목으로 가정에서의 역할만을 여성에게 요구하던 사회에서 여성 참정권을 쟁취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겁니다. 결국 한국과 일본 모두 여성 참정권 부여는 1945년, 즉 이른바 ‘현대’에 들어가서야 가능했던 겁니다. 2025년 현재, 여성이 역할이 가정 내로 국한되던 고정관념은 거의 해체되었다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여기서 하나의 지표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변호사시험 합격자 중 여성 비율은 2024년 기준으로 한국이 43.6%, 일본이 30.2%이며, 매년 그 비율이 증가 추세에 있습니다. 남녀평등이 이만하면 거의 실현된 것 아니냐는 일각의 주장은 이러한 지표 등을 근거로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근래에는 특히 20~30대 남성 일각을 중심으로 남녀 간에 평등을 넘어 오히려 ‘역차별’이 존재한다는 주장마저 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남성에게만 부과되는 한국의 병역 의무복무제는 역차별 주장의 가장 강력한 논거입니다. 군 복무로 인한 경력단절, 사회진출 지연은 남녀 간의 임금 격차로도 이어진다는 주장입니다. 나아가 여성전용 주차장, 남성이 더 부담하는 데이트문화 등도 문제시되곤 합니다. 일본의 경우에는, 여성 채용승진 할당제와 같은 여성우대 정책을 남성 역차별로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역차별 인식이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남녀 갈등이 심화되는 큰 요인이 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녀의 신체적, 환경적 차이를 불문하고 기계적 평등을 추구하면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요. 남녀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동일시되는 그런 사회가 과연 바람직한 사회일까요. 진정한 남녀평등이란 무엇이며,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과 개선이 필요할까요? 마지막 절에서는 이 난제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4. 남녀평등으로 시작되는 차별 없는 평등사회
(1) 부끄럽지만 제 자신의 이야기를 조금 해 보려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스스로 여성을 차별한 적이 없으며 여자대학의 교수로 근무하며 나름대로 남녀평등사회 구현을 위해 노력해 왔다고 믿어 왔습니다. 하지만 고백하자면, 저는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제 여동생을 떠올렸습니다. 서울의 대학에 올 수 있는 성적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을 전공한다는 이유로 고향의 대학에 진학한 하나 뿐인 여동생이 어쩌면 이미 상경해 있던 오빠인 저 때문에 서울행을 고려할 수 있는 선택권조차 아예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교 2학년을 마치고 갑작스레 음악을 포기하고자 했던 여동생의 잠시간의 반항 혹은 방황이 비로소 이해될 것 같았습니다. 결국 저 또한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의 꿈과 성취에 걸림돌이 된 그녀의 가족과 다를 바 없는 존재였던 셈입니다. 누군가가 의도를 지니고 적극적으로 차별하지 않았더라도 이렇게 차별은 발생합니다. 이는 차별이 개인의 의지나 이해의 영역을 넘어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자동화된 관습과 시스템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 차별의 시스템 속에서 저 또한 자유롭지 않았음을 이제야 인정합니다. 그렇기에 여성차별 해소를 통해 진정한 남녀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우선 평등과 차별이 시스템과 관습의 문제라는 것을 이해하고, 개인과 공동체 모두 시스템과 관습을 개선하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중요하겠습니다.
(2) 또한 남녀평등 문제는 여성차별 해소 이슈로만 국한해 사고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차별을 극복하기 위한 모색은 장애인, 노인, 성소수자 등 마이너리티 전반에 대한 차별 해소 논의로 그 문제의식의 지평이 확장, 심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여성의 권리와 인권에만 집착해 다른 소수자 문제를 등한시하는 일부의 협소한 페미니즘은 진정한 남녀평등 구현에도 걸림돌이 된다고 봅니다. 2020년, 숙명여대에 합격한 트랜스젠더 학생이 학내 일부 학생들의 강경한 반대에 부딪힌 끝에 결국 입학을 포기한 사건이 그 일례일 것입니다. 그 학생은 성전환을 통해 법적인 여성으로 인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생물학적 여성만이 여대에 함께할 수 있다는 고정관념에 가로막혀 입학이 좌절되었습니다. 참고로 일본의 명문여대 오차노미즈 여자대학은 트랜스젠더의 입학이 허용될 뿐 아니라 성중립 화장실 설치, 통명 사명 등 트랜스젠더 학생을 배려하는 다양한 편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일부 페미니즘의 이러한 배제가 진정한 남녀평등을 가로막는 편견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은 역사적으로 가장 오랫동안 극심한 차별을 겪어온 마이너리티의 대표적 존재입니다. 그러했던 여성들이 다른 마이너리티의 고난을 공감하고 포용하기는커녕 오히려 소외시키는 상황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여성, 성소수자 등을 둘러싼 주장과 논의는 매우 복잡하며 결코 간단한 주제는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하나는, 남녀평등 사회의 구현은 여성차별 해소를 넘어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다른 마이너리티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는 노력으로 확산되어야만 그 정당성과 의의를 더욱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3) “절대적 피해자도 절대적 가해자도 없다” 피해와 가해 관계가 매우 뚜렷한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회 문제에서 우리 모두는 피해자가 될 수도 있고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코로나 시기, 유럽에서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혐오와 폭력의 피해를 입었던 이들이 정작 자국의 인종차별에는 무심한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재일코리언은 일본인과 한국인의 경계에 있다는 이유로 한때 일본과 한국 모두에서 차별을 받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어느 백인 페미니스트 교수는 흑인 여성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했습니다. 틀딱충, 꼰대 등 노인혐오가 문제시되는 현대사회에서도 변하지 않는 진실은 우리 모두가 노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장애인은 선천적 장애인(12%)에 비해 후천적 장애인(88%) 비율이 훨씬 더 높습니다.  차별과 혐오는 나와 무관하다는 인식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입장, 약자의 관점에서 더 세상을 바라보고 사고하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소통하고 서로 공감(共感)해야 합니다. 똑같이 사고하고 느끼는 동감(同感)은 불가능하더라도 차이를 인정하고 함께 사고하고 느끼는 공감(共感)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여성과 남성, 남성과 여성은 대립하는 쌍방이 아니라 그 밖의 타자들과 더불어 공존해야 할 존재입니다. 이러한 자각을 가까운 곳으로부터 함께 실천에 옮길 때, 남녀평등은 다른 평등도 그러하듯이 실현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너무 이상적일까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일본

我が社会の男女平等は充分であるか?

李志炯
(淑明女大日本学科)

1. 今日の主題
こんにちは、日韓の大学生の皆さん。
キャンプもいよいよ終わりに近づいてきましたね。今ではお互いにたくさん交流し、より親しくなられたことと思います。 本日の特別講義では「私たちの社会の男女平等は十分なのか?」というテーマについてお話ししたいと思います。一般的に「平等」は、その社会の近代化や民主化の程度を測る代表的な指標として取り上げられます。平等が実現されていない場合、それはすなわち相対的弱者に対する不平等や差別となります。男女平等や人種間の平等が実現されていないとき、それを女性差別や黒人差別と呼ぶのはその一例です。とりわけ女性差別は、ユダヤ人差別と並んで、人類史上もっとも根深い差別の一つであると専門家たちは指摘しています。したがって、本日のテーマは「私たち 社会の女性差別は十分に改善されたのか」と言い換えることもできるでしょう。 韓国と日本、日本と韓国の社会における女性差別は、果たして過去に比べて十分に改善されたのでしょうか。皆さんご自身は、女性として(あるいは男性として)差別を経験したことはありませんか。差別の改善がまだ不十分であるとすれば、その解決策としてどのようなものが考えられるでしょうか。日韓両国の未来を担う若い皆さんの率直なご意見と活発な交流を期待しながら、講義を始めたいと思います。少し重いテーマになるかもしれません。
2. 韓国と日本の男女平等の現状
 1980年代に大きな人気を集めた韓国のテレビ番組の中に、《息子と娘》という連続ドラマがありました。ドラマの主人公は田舎出身の男女の双子です。双子のうち、息子の名前は「貴男(クィナム)」、娘の名前は「後男(フナム)」でした。男児優先の思想が特に強かった韓国社会では、息子と娘、すなわち男性と女性に対する態度の違いを二人の名前から容易にうかがい知ることができます。息子は「貴い男性(貴男)」である一方、娘は単なる「男性の影(後男)」にすぎません。両親は息子をソウルの大学に進学させて出世を願いますが、息子以上に成績が優秀な娘には高校以上の進学を許しませんでした。女性の将来の希望が大半「良妻賢母」であった1960〜70年代には、大学に進学する女性は多く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落胆の末に家を飛び出した娘は職場で働きながら自力で大学を卒業し、キャリアウーマンとして成功します。その代わり、家族の期待を一身に背負った息子は司法試験に合格できず、平凡な会社員として挫折感に満ちた人生を送ることになります。このように、伝統的な男児優先思想は、家庭の中においても根強かった男女差別のもう一つの姿であると言えるでしょう。では、韓国社会の男女差別の様相はその後、改善されたのでしょうか。  この質問への回答として、映画化も話題となった趙民珠(チョ・ミンジュ)の小説『82年生のキム・ジヨン』(2016年)が挙げられるでしょう。小説は1982年に生まれた30代半ばの女性キム・ジヨンが、成長過程や社会で経験する不利益や差別を主人公の視点から繊細に描いています。彼女は家庭では弟に優先権を譲り、ようやく就職した会社ではセクハラを受け、結婚後は子どものために自分の仕事や夢をあきらめざるを得ません。夫がどうにか彼女を「助けようと」しても、結局家事や育児はすべてキム・ジヨンの担当となります。さらに、彼女が望まない専業主婦としての生活は、社会の一部から「マムチュン(ママ虫)」と呼ばれ、嫌悪の対象となることもあります。その中で、キム・ジヨンの心と体は次第に疲弊していきます。このように見ると、21世紀においても女性の生活は表面的に見えるものとは異なり、母親世代と本質的には変わっていないように思えます。この小説が日本でも翻訳され、旋風的なブームを巻き起こしてベストセラーになったのは、日本の女性たちもキム・ジヨンが経験するさまざまな差別や不平等に強く共感したからでしょう。  では、韓国と日本の実際の男女平等の実態はどうでしょうか。主観的な評価を排除するために、信頼性のある機関の客観的な指標を引用してみましょう。各国の男女平等の状況を確認する際、最もよく引用される資料は、世界経済フォーラム(WEF)と国連開発計画(UNDP)が毎年発表する男女平等指数です。まず、世界経済フォーラムの資料によれば、韓国は2024年に94位、2025年には101位でした。では、日本はどうでしょうか。日本は2024年が118位、2025年も同じく118位です。韓国と日本は共に下位に位置しており、両国の経済規模や文化水準に比べると、驚くほど低い順位であることは否定できません。しかし興味深いことに、国連開発計画の資料によれば、韓国は2025年に175か国中12位、日本は22位と、両国ともかなり高い順位を示しています。なぜ、この二つの指標の間にはこれほど大きな差があるのでしょうか。  結論として申し上げると、世界経済フォーラム(WEF)と国連開発計画(UNDP)がそれぞれ男女平等指数を算出する方法が異なるためです。世界経済フォーラムのジェンダーギャップ指数は、国家の絶対的な水準に関わらず、男女間の格差が小さいほど高いスコアを付与します。これに対して、国連開発計画のジェンダー不平等指数は、男女間の格差に加えて、国家の絶対的な発展水準も反映されます。そのため、他の開発途上国に比べて経済規模や保健、教育などの基本指標が優れている日本と韓国は、高い順位を記録することになるのです。  一方、男女間の賃金格差や企業・公共機関における管理職女性比率など、細かな相対的指標を反映する世界経済フォーラムのランキングでは、日韓の順位は非常に低くなっています。これは、日本と韓国が量的には先進国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細部の質的側面では依然として男女平等を十分に実現できていない性差別的な国であることを意味すると言えます。目によく見えませんが、女性が一定以上の地位に昇進するには大きな差別と制約が伴う、いわゆる「ガラスの天井(Glass ceiling)」がその代表例です。韓国と日本のガラスの天井指数は、「先進国クラブ」と呼ばれるOECD(経済協力開発機構)加盟国の中でも最下位圏に位置しています。  外から見える以上に、女性差別の壁は依然として強固であり、男女平等への道は険しいままです。
3. 差別と区別は違う?!
 韓国のことわざに「雌鶏が鳴くと家が滅びる」というものがあります。家庭で女性の干渉が過ぎたり、女性が主導権を握ると家が順調でなくなる、という意味で一般的に理解されていますが、このことわざの起源は意外と古いものです。高麗時代の歴史書『高麗史』に記録された「雌鶏が雄鶏に変わると反乱の兆し」という故事に由来するとされ、もともとは陰陽のバランスが崩れると家に変故が起こるという意味でした。当初はバランス、すなわち調和に重点があり、雌鶏そのものに焦点が当てられてい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男性中心の家父長制が盛んだった朝鮮時代を経る中で、女性の発言権や役割を制限する女性差別的な表現として通用するようになりました。現在では女性に対する偏見に満ちた時代遅れのことわざとされていますが、このような改善された認識が定着するまでには、多くの時間と努力が必要でした。  「泣け!雌鶏よ」  1998年、ソウルのある女子大学が掲げた大学PRキャッチコピーです。当時、世間で大きな話題となったこのコピーですが、実は校内でも反対する人が少なくなかったといいます。その大学の教育理念に「貞淑」が含まれていたことを考えれば、反対意見の背景も理解できます。幸い、このコピーは1998年に韓国広告大賞を受賞するなど、男女平等の時代を先導するスローガンとなりました。この文句とともに、「出てこい!女性大統領」、「走れ!アマガエル」などのコピーも、男女平等という時代の転換と古くからの固定観念の解体を宣言するスローガンでした。言い換えれば、21世紀を目前に控えた時点でも、女性に対する偏見や相対的な差別が依然として根強く存在していたことを示す証拠とも言えるでしょう。  時代をさかのぼれば、近代史は女性解放の歴史と言っても過言ではありません。「民主主義の発祥地」と呼ばれるイギリスで女性に参政権(選挙権・被選挙権)が与えられたのは1928年に至ってからでした。アメリカは1920年、フランスは1944年です。近代国家で男性に参政権がほとんど19世紀前半から中盤にかけて与えられたことを考えると、非常に大きな時間差と言えます。では、日本と韓国はどうでしょうか。日本では1945年のアジア太平洋戦争終戦後、韓国では1948年の大韓民国政府樹立後になってようやく女性の参政権が保障されました。平等を旗印とする近代においてさえ、なぜこれほど女性の正当な政治的権利行使が保障されることは困難だったのでしょうか。  一般に、産業革命や市民革命を基準点とする「近代」以降、大きく変化した分野の一つが教育です。いわゆる「国民」を対象とした義務教育が実施され、女性も教育の対象となり、女子校などを中心に近代教育を受けるようになりました。ただし、女性教育の目的は「賢母良妻」として女性を養成することにありました。つまり「賢い母であると同時に、立派な妻」というのが近代女性に提示された進路でした。平等が時代のモットでなかった近代以前、男女の関係を規定する理論は「男性優位論」でした。身体的・精神的能力のいずれにおいても男性が女性より絶対的に優れているという立場です。しかし、平等を旗印とする近代において、男性の一方的優位を当然とする主張は時代精神にそぐわなくなります。そこで登場したのが「男女性差論」です。男女は性的差(性差)があるため、それぞれ優れている分野や適した能力・素質の領域が異なるという理論です。ここで男性は理性的、女性は感性的であるという論理が登場します。現在でも、固定観念として無意識のうちに強く作用している認識でもあります。  この論理によれば、男性は理性に優れているため、政治や行政などの社会活動に適しており、女性は感性が発達しているため、内助や育児などの家庭活動に向いている、という結論に至ります。近代日本の有名な文句である「男は外、女は内」もまさにこれを示しています。科学理論という名目で家庭での役割のみを女性に求める社会において、女性の参政権を獲得することは決して容易な道ではなかったでしょう。結局、韓国と日本のいずれも、女性に参政権が与えられたのは1945年、すなわちいわゆる「現代」に入ってからのことでした。  2025年現在、女性の役割が家庭内に限定されるという固定観念は、ほぼ解体されたと言っても差し支えないでしょう。ここで一つの指標を例に挙げてみます。弁護士試験合格者に占める女性の割合は、2024年時点で韓国が43.6%、日本が30.2%であり、毎年その比率は増加傾向にあります。男女平等はこれでほぼ実現し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一部の主張は、こうした指標を根拠にしています。さらに近年では、特に20〜30代の男性の一部を中心に、男女間に平等を超えてむしろ「逆差別」が存在するという主張が出ているのも事実です。男性にのみ課される韓国の兵役義務は、逆差別論の最も強力な論拠とされています。軍務によるキャリア中断や社会進出の遅れが、男女間の賃金格差にもつながるという主張です。さらに、女性専用駐車場や、男性がより負担するデート文化なども問題視されることがあります。日本の場合には、女性採用・昇進の割当制のような女性優遇政策を男性の逆差別とみなす傾向があります。  問題は、こうした逆差別の認識が若い世代を中心に男女間の対立を深刻化させる大きな要因となっている点です。男女の身体的・環境的差を問わず、機械的な平等を追求すれば、この問題は解決できるのでしょうか。男女があらゆる面で絶対的に同一視される社会は、本当に望ましい社会なのでしょうか。真の男女平等とは何であり、それを実現するためにはどのような努力と改善が必要なのでしょうか。最後の節では、この難題について考えてみたいと思います。
4. 男女平等から始まる差別のない平等な社会
(1) 恥ずかしいことですが、少し私自身の話をしてみたいと思います。個人的には、私は自ら女性を差別したことはなく、女子大学の教員として勤務し、男女平等社会の実現のためにそれなりに努力してきたと信じてきました。しかし告白すると、私は小説『82年生のキム・ジヨン』を読んで、自分の妹のことを思い出しました。ソウルの大学に進学できる学力は十分にあったにもかかわらず、音楽を専攻するという理由で故郷の大学に進学したたった一人の妹が、もしかするとすでに上京していた私の存在のせいで、ソウル進学を考える選択肢すら与えられてなかった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を、初めて考えたのです。そう考えると、高校2年を終えた後、突然音楽を諦めようとした妹の一時的な反抗や迷いが、ようやく理解できるように思えました。 結局、私自身も『82年生のキム・ジヨン』でキム・ジヨンの夢や達成を妨げた彼女の家族と何ら変わらない存在であったわけです。誰かが意図をもって積極的に差別しなくても、このように差別は発生します。それは差別が個人の意志や理解の領域を超えて、無意識に作用する自動化された慣習やシステムの問題だからです。その差別のシステムの中で、私自身も自由ではなかったことを、ようやく認めます。したがって、女性差別を解消し、真の男女平等を実現するためには、まず平等と差別がシステムや慣習の問題であることを理解し、個人と共同体の双方がシステムや慣習を改善するためにさまざまな努力を払うことが重要である
(2) また、男女平等の問題は、女性差別の解消という課題だけに限定して考えるべきではないと思います。女性差別を克服するための模索は、障害者、高齢者、性的少数者など、あらゆるマイノリティに対する差別解消の議論へと、その問題意識の地平を拡張し、深化させていく必要があると考えます。したがって、女性の権利や人権だけに執着し、他の少数者の問題を軽視する一部の狭義のフェミニズムは、真の男女平等の実現にとっても障害になると考えます。2020年、淑明女子大学に合格したトランスジェンダーの学生が、学内の一部学生たちの強硬な反対に直面し、最終的に入学を自ら断念せざるを得なかった事件は、その一例でしょう。その学生は性別適合手術を経て法的には女性として認められ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生物学的女性だけが女子大に入学できる」という固定観念に阻まれ、入学が挫折したのです。ちなみに、日本の名門女子大学であるお茶の水女子大学では、トランスジェンダーの入学が認められているだけでなく、ジェンダーニュートラルのトイレ設置や通名の使用など、トランスジェンダー学生に配慮したさまざまな便宜が提供されています。と言えるでしょう。  私は個人的に、一部のフェミニズムに見られるこのような排除は、真の男女平等を妨げる偏見と本質的に変わらないと考えています。「女性」は歴史的に最も長く、そして深刻な差別を受けてきたマイノリティの代表的な存在です。そのような女性たちが、他のマイノリティの苦難に共感し包摂するどころか、かえって疎外してしまう状況は、誠に残念なことです。もちろん、女性や性的少数者をめぐる主張や議論は非常に複雑で、決して単純なテーマ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一つ確かなことは、男女平等社会の実現は女性差別の解消にとどまらず、社会を構成する他のマイノリティへの差別を改善しようとする努力へと広がってこそ、その正当性と意義が一層認められるという点です。
(3) 「絶対的な被害者も、絶対的な加害者もいない」
 被害と加害の関係が非常に明確な一部のケースを除けば、社会問題の多くにおいて私たちは誰しも被害者にもなり得るし、加害者にもなり得ます。コロナの時期、ヨーロッパでアジア人であるという理由だけで差別や暴力の被害を受けた人々の中にも、自国における人種差別には無関心な場合が少なくありませんでした。在日コリアンは、日本人と韓国人の境界にあるという理由から、かつて日本と韓国の双方で差別を受けたこともあります。アメリカのある白人フェミニストの教授は、黒人女性を軽視しているとして批判されたこともあります。「ジジイ虫」 「コンデ(年寄り臭い)」などのように高齢者への蔑視が問題視される現代社会においても、変わらない真実は、私たち全員がいずれ高齢者になる、ということです。障害者についても、先天的な障害者(12%)に比べて、後天的な障害者(88%)の割合がはるかに高いのです。  差別や憎悪は自分とは無関係だと考えるほど愚かなことはありません。だからこそ、私たちは相手の立場や弱い立場の人の視点から世界を見つめ、考えようとする努力を惜しんではならないのです。お互いに対話し、そして共感し合うことが大切です。まったく同じように考え、感じる「同感」は難し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違いを認めながら共に考え、感じる「共感」は決して不可能ではありません。女性と男性、男性と女性は対立する両者ではなく、他の多様な存在と共に共生していくべき存在なのです。こうした自覚を身近なところから実際に行動に移していくとき、男女平等は、他のあらゆる平等と同じように、現実のものとなっていくのだと思います。
 私の考えは少し理想的すぎるでしょうか。
 皆さんはどう思われますか。